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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 머무는 곳, 부석사에서 나를 마주하다

by memiin 2025. 4. 8.

위로를 나타내는 사진

 

소설을 읽고 난 후 떠나지 않는 장면

낙엽이 소복이 쌓인 돌계단, 고요한 사찰의 풍경, 그리고 그 풍경 속에 서 있는 한 사람의 뒷모습. 신경숙의 『부석사』는 이런 이미지로 내 마음에 들어옵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찾아간 장소는 경상북도 영주에 위치한 실존 사찰 '부석사'이지만, 그곳은 한 사람의 내면 깊숙한 곳에 오래도록 잊고 지낸 감정이 잠들어 있는 심리적 장소입니다.

부석사로 향하는 마음의 여정

『부석사』는 간결한 구성의 단편소설이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의 깊이는 묵직합니다. 이야기는 평범한 일상 속 ‘나’가 문득 오래전 연인을 떠올리며,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부석사로 향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특별한 계획 없이 오래 묻어둔 감정에 이끌려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가는 길, 그 여정 속에서 ‘나’는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둘씩 꺼내봅니다.

그 사람과 함께 걷던 길, 돌계단을 오르며 나누던 대화, 서로를 바라보던 시선은 시간이 지나 더욱 선명해집니다. 작가는 풍경, 계절, 공기까지 섬세하게 묘사하며 주인공의 감정과 어우러지는 장면을 그려냅니다. 부석사는 기억과 현실이 만나는 무대이며,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정서적 공간입니다. 주인공이 계단을 오르는 모습은 기억을 하나씩 되짚는 듯하고, 사찰에서 풍경을 바라보는 장면은 감정의 결론보다는 조용히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주인공의 여정은 단순히 한 장소를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은 마음의 골짜기를 통과해 가는 길이며, 잊혀졌다고 믿었던 감정들이 천천히, 그러나 명확하게 되살아나는 여정입니다. 말 없는 풍경과 침묵 속에서 되살아나는 감정은, 오히려 요란한 말보다 더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리고 독자는 그 길을 함께 걸으며, 자신도 모르게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움이라는 이름의 기억

『부석사』를 읽으며 가장 오래 남는 감정은 ‘그리움’입니다. 주인공이 떠올리는 사람은 더 이상 곁에 없지만,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또렷하고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눈빛, 말투, 걸음걸이 하나까지도 잊히지 않고 마음속에 남아 있죠. 완전히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 흔적이 얼마나 오랜 시간 남는지를 이 작품은 보여줍니다.

왜 그때 말하지 못했을까, 왜 돌아서야 했을까, 내가 조금 더 용기를 냈다면 어땠을까. 이런 질문들은 주인공만의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감정을 가슴에 안고 살아갑니다. 신경숙은 이런 감정을 절제된 언어로 건드리며,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여백 속에서 더 깊은 울림을 만들어냅니다.

“그 사람은 내 이름을 마지막까지 기억했을까”라는 문장은 사랑했던 시간에 대한 회한과 자존감, 그리고 진심의 무게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오래 간직하는 것은 어떤 순간보다도 ‘누군가의 이름’이며, 그 이름은 삶의 한 켠을 조용히 지탱하는 기둥이 됩니다.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그 이름이 메아리칩니다. 그런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진해집니다.

『부석사』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기억’, ‘후회’,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과거를 되새기며 결국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통해 나를 기억하고, 때로는 그 사람이 떠난 뒤에야 그 관계 속의 나를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움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일부로서 남게 됩니다.

위로가 되는 문학

이 작품은 조용히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줍니다. 단지 슬퍼서가 아니라, 내가 품고 있던 감정이 이야기 속에서 이해받은 듯한 느낌 때문입니다. 신경숙은 말합니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일은 그 사람뿐 아니라 그 곁에 있었던 나 자신을 기억하는 일이라고. 그리고 그 기억은 우리가 잊고 지낸 삶의 조각을 다시 붙이게 해줍니다.

『부석사』는 큰 사건 없이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가 쉽게 지나쳤던 순간들, 말하지 못한 감정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을 다정하게 바라보게 해줍니다. 누군가를 오래도록 품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감정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신경숙의 문장은 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감정을 깊이 끌어올립니다.

소리 내어 울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줍니다. 그렇게 조용히 살아내는 일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이야기해줍니다. 그녀는 독자의 마음을 휘젓지 않고 조용히 곁에 앉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치 오래된 친구가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아주는 것처럼.

그래서 『부석사』는 슬픔을 자극하는 작품이 아니라, 슬픔을 다루는 법을 알려주는 작품입니다.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고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는 문학의 힘을 보여줍니다. 또한 문학이 어떤 방식으로 위로가 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좋은 예이기도 합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을 꺼내주는 도구이자, 무의식 속 감정을 부드럽게 비추어주는 거울이 되는 작품입니다.

마무리하며

이 작품을 통해 나는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내 마음속에도 그런 부석사가 있을까?” “나는 그곳에 아직도 머물고 있는 건 아닐까?” 『부석사』는 독자의 마음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키며 감정과 기억을 들여다보는 여정을 유도합니다. 그리고 그 여정 끝에서 우리는 조금은 정리된 감정,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것은 작은 정화의 순간이며, 문학이 줄 수 있는 가장 다정한 위로 중 하나입니다. 그리움과 후회,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한 자락의 바람처럼 마음을 스쳐가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 또 한 번 자신을 어루만지는 법을 배웁니다. 『부석사』는 결국,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사찰이며, 잊고 있던 감정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됩니다.

 

신경숙 작가는 아시아 작가로는 최초로 맨 아이사 문학상을 수상했고, 대표작으로는 [엄마를 부탁해], [풍금이 있던 자리], [외딴방]등이 있고, 그녀의 작품은 가족,기억, 상실, 그림움 같은 주제를 섬세하고 절제된 문체로 풀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