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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깊은 집 - 조용히 피어난 전쟁 이후의 삶

by memiin 2025. 4. 12.

[마당 깊은 집] 책 표지

 

전쟁은 총성과 폐허만 남기지 않습니다. 그 뒤편에는 여전히 밥을 지어야 하고, 아이는 자라야 하며., 사람들은 서로를 의지해 살아가야 하는 날들이 이어집니다. 김원일 작가의 [마당 깊은 집]은 바로 그런 나날들 속에서 피어난 조용한 삶의 기록입니다. 대구의 오래된 기와집, 깊고 깊은 마당을 중심으로 모여든 피난민 여섯 가족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전쟁의 참상 너머에 인간다움과 회복력, 그리고 작은 희망의 빛을 마주하게 됩니다. 

전쟁의 그늘 아래, 마당 깊은 그 집에 모여든 사람들

1950년대 초,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김원일 작가는 그 참혹했던 시절의 단면을 한 채의 오래된 기와집, 마당 깊은 집을 무대로 삼아 풀어냅니다. 이 집은 대구 장관동에 위치해 있으며, 전쟁을 피해 몰려든 피난민 여섯 가구가 함께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겉보기에는 한 지분 아래의 공동체 같지만, 각자의 아픔과 상처, 욕망을 안고 사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교차되면서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 같은 풍경이 펼쳐집니다. 이 집은 단순히 피난민들이 거처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여기는 생존의 전선이며, 하루하루를 버텨내야만 하는 전장의 연장이기도 합니다. 마당은 넓지만, 그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긴장은 결코 여유롭지 않습니다. 겨울이 되면 장작을 놓고 다투고, 여름이면 전염병과 굶주림의 두려움 속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집은 아이들의 뛰어놓고, 웃음이 터지는 순간들도 공존하는 복합적인 공간입니다. 이처럼 마당 깊은 집은 전쟁의 참혹한 현실과 인간성의 회복이 교차하는 장소로 기능합니다.

이 소설이 화자는 초등학생인 길남입니다. 그의 눈을 통해 독자는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적으로 마주하기보다는,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작은 전쟁을 목격하게 됩니다. 장작을 놓고 벌어지는 싸움, 배급 문제로 생긴 갈등, 이념 차이에서 오는 의심 등은, 그 시대가 안고 있던 분열과 생존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어린 길남은 그 모든 장면을 순수한 눈으로 담아내지만, 동시에 깊은 슬픔과 무력함을 느끼며 성장해 갑니다. 

이처럼 [마당 깊은 집]의 시작은 단지 한 가족의 이야기로 출발하지만, 곧 모든 인물이 저마다의 시대적 배경과 사연을 지닌 존재로 확장됩니다. 그 집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의 이유로 피난을 왔고, 이웃이 되었으며, 때론 가족보다 더 가까운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만큼 더 예민해지고, 갈등하며, 함께 견뎌야만 했습니다. 작가는 이러한 인간 군상을 통해 전쟁이 한 개인과 가족, 공동체에 미친 영향을 다층적으로 조망합니다. 

다양한 삶의 조각 -여섯 가구, 여섯 이야기

[마당 깊은 집]에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사연과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곧 당시 한국 사회가 겪던 단면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피난민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이 살아온 삶의 궤적과 처한 상황은 천자만별이며, 이는 곧 공동체 안의 갈등과 연대의 기반이 되기도 합니다. 각자의 인생이 한 집이라는 공간 안에서 읽히고 설키며 작은 사회를 구성해 가는 과정은, 이 소설의 가장 사실적이면서도 공감 가는 대목 중 하나입니다. 

 

길남의 가족 

이 소설의 화자인 길남은 어머니와 함께 피난 온 소년입니다. 아버지는 전쟁으로 북에 남겨졌고, 어머니는 남의 집 살림을 해가며 생계를 이어갑니다. 길남은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집 안팎의 갈등과 분위기를 오록이 눈에 담으며 성장해 갑니다. 그의 시선은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서늘하게 주변의 어른들을 비춥니다. 이 가족은 전쟁의 상처뿐 아니라, 부재하는 부권과 여성 가장의 현실을 상징합니다. 

임 씨 아줌마네 

억척스럽고 생명력이 강한 인물인 임 씨 아줌마는 미군 부대에서 폐품을 주워 생계를 유지합니다. 언행이 거칠고 욕설이 난무하지만, 아이들을 향한 정과 생존 본능에서 우러나는 삶의 진실함이 있습니다. 그녀는 비굴하면서도 강인한 여성의 전형이며, 냉혹한 시대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밑바닥 민중의 현실을 대변합니다. 

윤 씨 아저씨 

과거에는 교사였지만 전쟁 후 사상 문제로 인해 일자리를 잃고 무직 상태로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그는 세상과 멀어지고, 말수도 줄어들며 고립되어 갑니다. 이념 갈등이 한 개인의 삶을 어떻게 무너뜨렸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며, 전후 사회의 이데올로기 탄압과 그로 인한 상처를 대변하는 인물입니다. 

홍 아저씨 

자기중심적이고 체면을 중시하는 인물로, 유난히 말이 많고 남을 가르치려 드는 성향을 보입니다. 그는 과거의 명예와 권위를 잊지 못한 채 사는 사람이며, 급변하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구시대의 유산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누구보다도 무력하고 나약한 존재로, 무너지는 권위주의의 얼굴을 드러냅니다. 

여인숙 운영자 

본채를 임대해 여인숙을 운영하며 세입자들을 통제하려는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녀는 당시 도시 빈민가 여성들 중 생존을 위해 가장 앞장서야 했던 이들의 대표 격으로, 생계를 쥐고 있는 위치에 있지만 동시에 그만큼 많은 스트레스와 외로움을 안고 있습니다. 그 모습에서 우리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복합적인 여성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생 출신의 여성 

과거 기생이었던 그녀는 전쟁 후 몰락한 삶을 이어가고 있지만, 동시에 세련되고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마당 깊은 집에 색다른 감정을 더합니다. 그녀의 존재는 단순한 과거 인물이 아니라, 시대 변화 속에서 밀려난 문화와 여성성, 잊힌 계층의 아픔을 은유합니다. 

 

하나의 에피소드를 보자면, 겨울이 되자 장작을 서로 더 가지려는 다툼이 벌어집니다. 임 씨 아줌마는 끈질긴 생존의지를 드러내며, 남의 몫까지 챙기려 하고, 다른 세입자들과 심한 언쟁을 벌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생활 갈등을 넘어, 내 것을 지키기 위한 전투이자, 그 시대 민중이 겪던 극한의 생존 경쟁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입니다. 동시에 그 안에는 체념, 분노, 그리고 피난민 사회의 피로가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이처럼 여섯 가구는 각기 다른 배경을 가졌지만, 좁은 마당을 중심으로 하나의 세계를 구성해 갑니다. 이 세계는 갈등과 소외, 경쟁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그 안에서도 때로는 정과 연대, 작은 웃음이 피어납니다. 김원일은 이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전쟁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조용히, 그러나 힘 있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이의 눈으로 본 세계 - 전쟁, 어른, 그리고 성장

[마당 깊은 집]은 성인 화자가 아닌, 어린아이 길남의 시선을 통해 전개됩니다. 이는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작가 김원일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서술 전략입니다. 어린 길남은 복잡한 사회 구조나 정치적 맥락을 이해하진 못하지만 그 순수하고 왜곡되지 않은 시선으로 어른들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오히려 더 진실하고, 때로는 더 가슴 아프게 현실을 직시합니다. 

길남은 침묵하는 관찰자입니다. 그는 늘 조용히 마당과 방 안을 오가며 이웃 어른들의 행동과 말투, 표정을 지켜봅니다. 장작을 두고 다투는 어른들, 매일같이 술에 취한 남자들, 이유 없이 울부짖는 여성들, 사라지는 사람들. 어른들의 갈등과 몰락, 체념의 모습을 바라보며 길남은 세상의 부조리함을 일찍이 체득하게 됩니다. 그 시선은 때로는 애처롭고, 때로는 철학적이기까지 합니다. 세상을 이해할 수 없지만, 동시에 외면할 수 없는 아이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길남이의 아버지는 북에 남아 있습니다. 어머니는 그 사실을 애써 숨기려 하고, 길남은 말하지 않아도 그 부재를 온몸으로 느낍니다. 그는 마당에서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만 언제나 혼자 있는 느낌을 지우지 못합니다. 시간이 흐르며 한 가구, 또 한 가구 떠나고, 마당 깊은 집은 점점 비어 갑니다. 집이 텅 비어 가는 모습은 길남의 내면과도 닮아 있습니다. 그 과정은 단순한 이별이나 이사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아이의 정서 속에 깊은 상실과 공허를 새깁니다. 

이러한 떠남은 곧 성장을 의미합니다. 남겨진 길남은 어른들을 통해 삶의 무게를 배우고, 이별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길남은 더 이상 세상을 낭만적으로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고통과 불공평함을,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현실을 깨닫습니다. 이는 비극적인 성장의 서사이지만, 동시에 전후 세대를 살아간 수많은 이들의 내면을 대변하는 보편적인 경험이기도 합니다. 

길남이 마당 깊은 집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던지는 질문, "사람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는 단지 소년의 철없는 궁금증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족이 해체되고, 공동체가 무너지고, 어른들이 자신의 위치를 잃어가던 시대의 비극에 대한 가장 순수한 질문이자, 독자에게 던지는 철학적 화두입니다. 삶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이처럼 [마당 깊은 집]은 아이의 시선을 빌려 오히려 더 깊이 있게 전쟁의 상처와 인간 내면의 풍경을 드러냅니다. 단순히 성장 서사를 넘어, 순수한 시선이 얼마나 강력한 서시적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작품입니다. 길남이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는 아이의 눈에도 세상은 무겁고 슬플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마무리

[마당 깊은 집]은 단지 과거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작품은 전쟁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었음을,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인간다움과 공동체의 의미를 조용히 되새기게 합니다.  아이의 눈을 통해 바라보게 한 김원일의 서술 방식은 독자에게 더 깊은 울림을 전합니다. 결국 이 소설은 "사람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라는 순수하면서도 묵직한 질문을 남기며, 우리 모두에게 삶과 연대에 대한 성찰을 요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