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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기관 고대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by memiin 2025. 3. 31.

교육기관 고대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교육기관 고대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어떤 교육시스템에서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서 내용과 질은 달라지닙니다. 지금 우리들은 거의 교육을 받고 있는데 예전에는 어땠을까 생각해보면서 우리나라 고대부터 교육기관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고대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대와 삼국시대

이 시기의 교육은 국가 차원의 제도적인 학교와 개인이나 사찰 중심의 교육이 혼재된 형태였습니다. 주로 지배 계층의 자제를 대상으로 한 교육 기관이라고 볼 수 있었고 유교적 소양과 정치적, 군사적 지도력을 기르는데 중점을 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고구려를 살펴보면 372년 소수림왕 2년에 태학을 설치하여 고등 교육기관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태학은 귀족 자제를 대상으로 유교 경전과 역사, 예법 등을 가르쳤고, 무예교육도 병행하여 관료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지방에는 경당이라는 교육기관이 있었는데 이는 평민 자제도 다닐 수 있었고 글과 무술을 가르쳤습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지방 교육의 사례로 평가된다고 합니다.

백제는 중앙에 태학에 준하는 교육기관이 있었으며 중국의 유학자나 학자를 초빙해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박사제도를 운영하여 오경박사, 역박사, 의박사 등을 두어 전문 분야별 교육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특히 일본에 유학을 보내는 등 국제적 교육 교류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신라는 고대에는 특별한 교육기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682년 신문왕 2년에 국가 조도의 교육기관인 국학을 설립하면서 체계적인 관학 교육을 시작했는데 국학은 신라 귀족 자제를 대상으로 유교 경전을 가르쳤으며 교육을 받은 자는 이후 관리로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신라 후기에는 독서삼품과라는 일종의 관리 등용시험도 시행되어 교육과 관직의 연계가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이처럼 고대와 삼국시대의 교육기관은 이념과 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인재 양성소로 기능했으며, 유교를 중심으로 한 학문교육과 무예수련이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이후 고려와 조선의 교육제도로 이어지는 토대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교육기관은 크게 '국가에서 운영하는 관학'과 대인이나 사림에서 운영하는 '사학'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교육의 목적은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한 인재 양성과 과거시험 준비에 있었습니다. 고려는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에 유교교육 기관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발전시켰습니다. 

고려전기에 성종은 유교정치 이념을 바탕으로 중앙에 '국자감'을 설치하여 관학 교육을 강화했습니다. 국자감은 오늘날의 대학에 해당하는 최고 교육기관으로 귀족계층의 자제를 대상으로 경전, 역사, 문학 등을 가르쳤습니다. 국자감에는 국자학, 태학, 사문학의 세 과정이 있었고 이는 신분과 학문 수준에 따라 나누었습니다. 고위 귀족 자제는 국자학에 중간 계층은 태학이나 사문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방교육을 위해서는 향교를 설치했습니다. 향교는 지방의 학생들을 교육하고, 동시에 유교적 윤리를 보급하는 기능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방에서는 인재가 많이 나오지 않아 실제로는 중앙의 국자감이 교육의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고려 중기 이후 관학의 위세가 약해지고 관학 교육의 질 저하와 정치적 부패로 인해 백성등 사이에서는 '사학'이 더 인기가 있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최중인 세운 '9재 학당'입니다. 최충은 당시 최고의 학자였으며 최충의 학당은 과거시험 준비에 뛰어난 성과를 보이며 '사학 12도'로 불리는 사설 교육기관 붐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고려 정부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예종 때 7재, 양현고라는 장학재단을 설치하며 관학 진흥책을 내놓았습니다.

고려 후기에는 성리학의 유입으로 학문 경향에도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성리학은 이후 조선시대의 교육이념과 제도로 이어지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고려시대의 교육기관은 국자감과 향교 같은 국가 기관과 최충의 9재 학당과 같은 사학이 공존하며 인재양성과 과거제 준비를 위한 교육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시기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유교, 특히 성리학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시기이므로 성리학을 기반으로 체계적인 교육제도를 갖춘 것이 특징입니다. 교육은 '관학'과 '사학'으로 나누어져  신분에 따라 교육기회에 차이가 있었고 궁극적인 목적은 과거시험을 통한 관료양성이었습니다.

중앙의 최고 교육기관은 성균관이었습니다. 성균관은 유교 경전과 예법, 역사 등을 교육하며 생원과 진사 시험에 합격한 소과 합격자만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성균관 학생들은 왕이 직접 강의하는 강론을 듣기고 했고 일정 기간 공부 후 문과 시험인 대과에 응시해서 고위 관리로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성균관은 학문을 익히는 동시에 인격을 수양하는 곳이었고 국가가 유학을 중시했다는 상징적인 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방에는 향고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향교는 지방의 양반 자제를 대상으로 유교교육을 실시했으며 그 지역의 예절과 도덕덕 교육에도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향교는 중앙의 통제를 많이 받았고 실제 교육 수준은 지역마다 차이가 컸습니다. 한편 일반 평민이나 서민층 자제는 향교보다는 성당에서 초보적인 교육을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서당은 마을 단위의 작은 교육기관으로 한문, 천자문, 동몽선습 등의 기초교육을 제고했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사설 교육기관인 서원이 크게 성장했습니다. 서원은 옛 성현의 제사를 올리고, 학문을 가르치는 곳으로 교육과 제사의 기능을 함께 했습니다. 대표적인 서원으로는 퇴계 이황이 세운 도산서원이 있으며 많은 성원이 중앙과 지방에 세워졌습니다. 서원은 교육뿐 아니라 지방 지식인의 정치적, 사회적 기반이 되었고 일부는 과거시험 응시에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서원이 많아지고 폐단이 생기면서 흥선대원군이 47개를 제외하고 대다수를 철폐하게 합니다. 

조선시대의 교육은 기본적으로 성리학 중심의 유교교육, 과거제 대비, 인격수양을 목표로 하였고 신분과 성별에 따라 교육기회에 차별이 있었지만, 교육을 통한 신분 상승의 기회도 존재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조선의 학교 체계는 이후 우리나라 근대 교육 제도 형성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마무리

고대와 삼국시대의 교육기관은 이념과 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인재 양성소로 기능했고 이후 고려와 조선의 교육제도로 이어지는 토대로 작용했습니다.  인재양성과 과거제 준비 등 교육을 통한 신분 상승의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그 당시의 교육은 이후의 교육 제도 형성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교육이란 현재의 삶을 업그레이드 하는 수단이라는 것은 현재에도 같습니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교육이라는 것에는 시대를 아우르며 갖고 있는 중요성이라고 하겠습니다.